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티스 르메이 (문단 편집) === 제2차 세계 대전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img.timeinc.net/1101450813_400.jpg|width=100%]]}}} || || 1945년 8월 13일 [[타임지]][* [[타임지]]의 표지로까지 나왔다는건 그만큼 2차 세계대전에서 [[도쿄 대공습]]의 위상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.] || 육군항공대 [[중령]]으로서 [[B-17]]로 구성된 [[제8공군]]의 지휘관 중 한 명이다. [[진주만 공습]]으로 폭격을 맞은 미국은 즉시 일본과 추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. 당연히 폭격기를 비롯한 항공 전력이 엄청나게 필요하게 되는데, 이 당시 제305 폭격비행단(305th Bombardment Group)에 배속된 르메이 중령은 말 그대로 맨 땅에서부터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마련하는 생고생을 시작해야 했다. 이 때 과로로 인해 안면 신경마비가 일어나 한동안 오른쪽 얼굴이 굳어진 탓에 훗날 괴팍하고 무뚝뚝하기만 한 장군 이미지가 더욱 강해지게 된다. 이때부터 미국 공군의 뿌리가 되는 육군 항공대 폭격기 마피아의 일원으로 전략폭격주의자가 되어 중요한 공습작전을 지휘하였다. 영국에 도착한 뒤 제8공군이 먼저 수행한 폭격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르메이 중령은 폭격의 피해가 폭격기 추락으로 인한 피해보다 못할 정도로 명중률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, 그 까닭이 목표 상공에서 대공포 사격이 시작된 뒤에 폭격기들이 10초 안에 탑재한 폭탄을 모두 떨구고 단체로 회피 기동에 들어갔기 때문임을 깨달았다. 첫번째 출격에서 르메이 중령은 목표에 도달했을 때 폭격이 끝나기 전까지 '''회피 기동을 포기하고 대형에 맞춰 직선으로 비행하라'''는 명령을 내렸다. 그리고 폭격기 승무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B-17을 상대로 한 [[88mm 대공포]]의 예상 격추율은 자신이 계산해본 결과 372발당 1대로[* 이 부분이 중요하다. 이후 르메이 장군이 주관한 작전은 전부 수치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한 계산된 행위였다. 이 때 르메이의 부하 장교였던 [[로버트 맥나마라|맥나마라]]의 회상에 의하면, 이 계산의 목적은 작전의 [[최적화]]를 통해 '''단위 아군 피해당 단위 적 목표 파괴량'''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. 이런 계산은, 첫째로는 당시 [[VT신관]]이 없어 시한신관을 B-17의 고고도 정밀폭격의 적정 고도에 맞춰 대공포탄이 터지게 세팅한 독일 방공포전대의 대응을 계산에 두고 폭발 범위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역이용 전략이었다. 물론 고고도 작전과는 달리 포탄이 직접 맞을 수 있는 만큼 어느 정도 규모의 아군 피해는 감수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리는데,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여러 번 작전을 나눠서 수행하는 것보다 아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단 한 번의 작전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쪽이 장기적으로 아군의 피해를 줄인다는 것이 르메이 중령의 지론이었다.] 비행단이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하고,[* 이는 불완전한 정보에 바탕한 분석이라 독일군 측이 분석한 3,000발당 1대보다 과대 평가된 수치이지만, 대략적인 피해를 숫자로 말해주는 것 자체로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.]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'''자기가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다!''' 결국 탄착률이 종전의 2배로 늘어나고 목표 상공에서 7분간 직선 비행을 하면서도 대공 사격에 폭격기 한 대도 잃지 않는 성공을 거뒀다. 1942년 말에는 이 폭격 전술이 제8공군 전체에 도입 된다. 이후로 르메이는 고속 승진을 시작하여 1943년 말 준장으로 진급하며 [[장군|별을 달았고]], 1944년 3월 불과 37세의 나이로 당시로는 최연소 소장이 되었다. 이때 훗날 미국의 국방장관이 되는 [[로버트 맥나마라]][* [[쿠바 미사일 위기]] 당시 국방장관으로써, 르메이의 상관이었다. 이 아이러니는 그가 나중에 찍은 회고록 형식의 다큐멘터리 [[전장의 안개|포그 오브 워]]에서도 잠깐 언급된다.]가 르메이 장군의 부하로 있었다. 이때 르메이 장군은 휘하 폭격기들의 높은 임무 포기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, 맥나마라는 특유의 분석력으로 임무 포기의 원인 대부분이 공포에 있음을 알아챘다. 이러한 보고를 들은 [[석기시대]] 매니아는 "돌아가는 놈들은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!"라고 외치며 '''또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다.''' 이 때는 부조종사로 탑승했다. 조종사로 탑승해보니 조종에만 신경쓰느라 폭격기 대형을 조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. 그 즉시 임무 포기율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. 그러나 이후 폭격기들은 호위기들이 따라가 보호해줄 수 없는 초장거리 임무에 나서야 했고, 그 덕에 폭격기 손실과 전사자는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. 결국 폭격기의 임무 범위는 호위기의 한계거리로 제한되기에 이른다. 이는 [[P-51 머스탱|P-51]]이 개발되기 전까지 독일 본토를 폭격하는 것이 힘든 이유 중 하나였다. 종전시까지 독일군에 의해 격추, 완파된 B-17 폭격기는 총 4751대로 집계되며 이는 독일 폭격에 투입한 전력의 1/3 에 해당했고 4만명의 사상자를 냈다. 제임스 캐럴은 자신의 저서 '전쟁의 집 - House of War'에서 2차대전 당시 르메이 장군이 지휘한 폭격기 편대는 [[영국군]]이나 다른 미 육군 폭격기 편대보다 낮게 날았기 때문에 타 부대의 2배에 해당하는 탄착을 보여준 한편, 피해도 컸다는 일화를 소개했다. B-17의 방어대형인 컴뱃 박스(combat box)를 창안하기도 했다. 슈바인푸르트 폭격작전에도 참가하여 비행대대를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으며, [[1944년]]에는 [[중국]] 전선으로 전속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